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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북한군에 입대한 임충익 씨는 제대할 때까지 10년 내내 ‘삽질’만 했다. 10년 동안 휴가로 집에 간 적은 단 한 번. 그것도 사흘뿐이었다. 10년 동안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사격을 한 것은 훈련에서 실탄 20여 발을 쏴 본 것이 전부다.
임 씨 사례는 예외적이진 않다. 북한군에는 임 씨처럼 군인 임무보다는 제대할 때까지 삽질만 죽도록 하는 청년이 많다. 임 씨는 그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처음 입대한 부대는 815훈련소(평양방어사령부)였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대대에 배속되자마자 평양-향산 고 햇살론 자격조건 속도로 공사 현장에 나갔다. 공사판에선 돌을 나르고 교각을 세웠다.
일이 힘든 것보다는 배고픈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옥수수밥에 염장(鹽藏) 무 반찬, 소금으로 간을 맞춰 멀겋게 끓인 시래기국만 먹어야 했다. 돌도 삭인다는 18세 나이인지라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면 먹을 것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1년 넘게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대대가 학자금대출 특별추천 기간 해산됐다.
두 번째로 배속 받은 부대에서는 금강산발전소 건설 현장을 나갔다. 부대는 금강산댐에서 원산까지 연결하는 길이 45㎞의 도수(導水)터널을 뚫는 일을 맡았다. 물길이라 하지만 바닥 폭 15m, 천정 폭 10m, 높이 11m의 어마어마한 굴이었다. 유사시 북한군 기계화 군단이 폭격을 피해 원산까지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일자리임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파(發破) 뒤 돌을 광차(鑛車)에 실어 굴 밖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공사 현장이 깊은 산골에 있는 데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갱 안에서만 살다 보니 사회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숱한 사람이 굶어 죽은 것도 알지 못했다.
당시 금강산발전소 건설 군인들에게는 매일 안남미 1kg이 식량으로 공급됐다. 할머니 안남미(米)는 영양가가 낮아 빨리 허기가 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량대로 병사들에게 공급됐다면 배고픈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대로 공급된 식량을 간부들이 다 빼돌려 일반 병사들은 늘 허기져 있었다. 반면 대대장이나 정치지도원 같은 간부들은 피둥피둥 살찐 얼굴이 늘 시뻘겋게 돼 돌아다녔다. 부하들 식량을 빼돌려 고기와 술로 바꿔 먹었던 것이다. 대출채권
안전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갱내에서 일하다 보니 사고도 잦았지만 다행히 임 씨는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 한번은 돌을 실은 광차를 몰고 나오는데 뒤에서 천장이 무너지는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
터널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제일 많이 죽는 부대는 발파 작업을 담당한 공병국(工兵局)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공병국 소속 군인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저녁이면 민가를 습격해 무자비하게 물건을 훔쳐 오다 보니 군인들 사이에서 공병국은 ‘화적떼’라고 불렸다. 금강산발전소에서 2년 동안의 일을 끝내니 또 부대가 해산됐다.
세 번째로 배속 받은 부대가 간 곳은 황해남도 과일군이었다. 과일군은 군 전체가 하나의 과수농장으로 전체 경지 면적 70%가 과수단지다. 주로 평양에 사과, 배, 복숭아, 감을 공급한다. 과수원 둘레가 40k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 임 씨는 병실을 짓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까지의 삶에 비하면 훨씬 편했다. 과일군에 간 이유는 어쩌면 공사를 하느라 수고했으니 잠시 쉬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
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은 농약을 잔뜩 친 과일을 익기도 전에 따먹다 죽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가을에 과일을 실컷 먹을 순 있었다. 애로는 땔감이 없는 것이었다. 나무뿌리를 힘들게 캐서 병실 난방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2~3년 있다가 네 번째로 배속된 곳이 4군단 125사였는데, 새로 만들어진 방사포부대였다. 황해도 구월산 주변 골짜기마다 병실만 짓다가 2003년에 제대했다.
부대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병사들과 만났기에 한 부대에만 있다가 제대한 군인보다 훨씬 힘들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노동당에 입당했으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당시엔 10년 동안 군복무를 하고도 입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번째로 다행인 점은 그나마 군 복무가 10년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많은 청소년이 굶어죽어 신병 보충이 여의치 않자 김정일은 1997년에 군복무 기간을 13년으로 늘렸다.
하지만 이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까지 군에 있게 된 고참 병사들이 인근 부락에서 결혼할 여자를 찾아 동거하기 시작했다. 군율(軍律)이 바닥에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김정일은 2002년, 군복무 기간을 다시 10년으로 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임 씨도 2006년까지 13년간 군복무할 뻔했다.
지난해 강원도 속초에 사는 아버지(왼쪽)과 함께 바닷가를 찾은 임충익 대표.
● “아들아, 남조선에 가자.”
고향인 청진에 돌아가니 부모님이 무척 노쇠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과일군에 근무할 때 딱 한 번 집에 갔다. 그것도 휴가가 아니라 탈영한 병사를 잡으려 간 사흘간의 공무 집행이었다. 군인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 오면 부대에 뭐든 배낭 한가득 들고 귀대해야 했기에 임 씨는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 가지 않았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 씨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무조건 남조선에 가야 해. 너는 결혼하지 마. 애가 생기면 못 가.”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그가 군에 간 사이에 중국에 가서 3년이나 살다가 왔다. 임 씨 부친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1950년대 말 대기근을 피해 북한으로 건너왔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친척이 많았다.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임 씨 부친도 청진조선소 산하 군함부품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집은 도시 변두리에서 대다수 노동자가 살던 ‘하모니카주택’이었다. 하모니카주택은 주택 하나를 단칸방 대여섯개로 쪼갠 형태를 말하는데 사생활 보호는 거의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1976년 임 씨가 태어났고 4년 뒤 남동생도 생겼다. 임 씨가 군복무를 할 때 하나 있던 누나는 병으로 숨졌다. 임 씨 학교생활은 평범했다. 수학처럼 원리가 있는 과목은 잘했지만 혁명역사처럼 무작정 날짜를 외우는 과목은 정말 싫었다.
김일성 생일 때 당과류 1kg을 선물로 받으면서 몇 번이고 고맙다며 김일성 초상화를 향해 인사하는 일도 싫었다. “사탕과자는 식료품공장 사람들이 만드는데 내가 왜 원수님께 인사를 해야 하냐”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끌려가 혼난 적도 있었다.
가정환경 자체가 북한에 충성하며 사는 집안도 아니었고, 군에서 세뇌를 당하며 충성심을 키우는 부대가 아닌 건설부대에 있었던 터여서 임 씨는 한국에 가자는 아버지 말에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탈북을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은 있었다.
중국에 있는 아버지 친척들이 도와줘서 임 씨 집안은 먹고살만 했다. 그가 군에 간 사이 동생은 목선을 사서 어업을 해서 돈을 잘 벌었다.
제대 후 임 씨의 첫 직장은 철도국 소속 짐함공장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컨테이너를 뜻하는 짐함이 많지 않았다. 직장생활은 무난했다. 2년쯤 지난 2006년 임 씨는 철도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하면 철도 간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3년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임 씨는 점점 북한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때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더러워서 못 살겠다’였다. 동생이 뱃일로 돈을 많이 벌다 보니 그의 집엔 보위부나 안전부 같은 곳의 정복 입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동당 행정기관 간부들까지 수시로 들락거리며 돈을 뜯어갔다. 많이 벌면 많이 번 만큼 뜯겼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각종 보복이 뒤따랐다.
임 씨가 이 같은 현실에 분노할 때마다 아버지는 “너희처럼 부지런한 애들은 남조선에 가면 무조건 잘산다”고 했다. 중국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는 한국의 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됐던 것이다.
어느 날 억울한 일을 당해 화가 폭발한 임 씨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좋아요. 남조선에 갑시다. 그런데 어떻게 가면 되나요?”
맏아들의 동의가 없어 결행하지 못하던 아버지는 화색이 돌아 대답했다.
“네 동생 배로 가면 제일 쉽다. 배를 타고 곧장 나가면 일본인데 거기까지 가면 성공인 거야.”
어쩌면 남동생이 배를 타게 된 것도 이날을 예견한 아버지의 기획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업소에서 직접 차량을 수리하고 있는 임충익 대표.
● 동해바다를 가른 기적의 6일
동생이 소유한 목선은 당시 북한 일반 목선에 비해 훨씬 컸다. 10명도 탈 수 있었다. 탈북 준비를 하면서 동생은 배에 엔진도 2개 장착했고 연료도 몰래 수백 kg을 실어 놓았다. 집에 있던 돈을 다 달러로 바꾸니 2000달러 정도 됐다. 당시 북한에선 엄청난 액수였다. 아버지는 “이 정도 돈이면 중국으로 탈북하기에도 충분하지만 배가 있으니 바다를 통해 바로 가는 것이 제일 쉽다”고 했다.
2007년 5월 27일 임 씨 형제와 부모는 탈북 길에 올랐다. 임 씨 형제가 배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동생 일을 도와주면서 자주 배를 타려고 드나들었기에 항구 초소를 통과하기 쉬웠다. 연로한 부모님은 다른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
바다로 나갔다가 유턴해서는 밤에 부모님을 싣고 다시 떠났다. 31세 임 씨와 27세 동생은 무서운 것 없는 나이였다. “어떤 놈들이 추격하면 다 죽여 버리고, 안 되면 우리가 죽으면 되지.” 각자 품속에는 최후에 쓸 쥐약도 한 봉지씩 있었다.
청진항에서 떠나자마자 나침반을 110도에 맞추고 최고 속력으로 항해했다. 목적지는 일본 니가타(新潟)항이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목선이라 추적은 없었지만, 항해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몇 시간 항해하니 목선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파도가 높아졌다. 3일쯤 지났을 때 태풍도 만났다. 집채만한 파도 앞 목선은 가랑잎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있었다. 동해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히면 구명조끼는 별 의미가 없기도 했다. 다행히 몇 년 동안 배를 탔던 동생은 침착했다.
“형, 물풍(풍닻·깔대기 모양 어선용 닻)만 든든하면 배가 뒤집히지 않으니 괜찮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버틴 것일 수도 있다.
출발 닷새째인 6월 2일 새벽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일본이란 것을 알았다. 북한 해안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배를 몰아 해안으로 접근했다. 방파제가 보여 배를 댔다. 뭍에 발을 들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보시오. 우린 북한에서 왔는데 경찰을 불러 주세요.”
말은 통하지 않아도 자신들 행색을 보고 놀랄 줄 알았는데, 행인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일본 사람들이 북한 목선을 본 적도 없고,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안 되겠어. 좀 더 큰 항구를 찾아갑시다.”
다시 배를 띄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헬기 두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해양순시선도 나타났다.
순시선 유도를 따라 아오모리(青森)현 후카우라(深浦)항에 들어갔다. 경찰차를 타고 아오모리경찰서로 이송돼 이틀쯤 조사를 받고는 헬기로 도쿄로 옮겨졌다. 도쿄로 이송될 때 언론사 헬기들이 따라붙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임 씨는 “우리가 참 대단한 일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
도쿄에서 불법체류자 수용시설에 수감됐다. 그래도 침대도 있고 방도 깨끗했다. 한국에서 나온 사람이 임 씨 일행을 맞이했다. 10여 일을 더 조사받았다. 품속에 넣고 온 2000달러는 압수된 뒤 신권으로 바꿔 받았다. 배는 포기각서를 써 줬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조사 시작부터 이들은 최종 목적지는 한국이라고 한결같이 말했다.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임 씨 가족은 6월 16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북한을 떠난 지 20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지난해 부모님과 아내, 아들 4명과 함께 말레이시아 여행을 다녀왔다.
● “자동차 장인이 되겠다.”
2007년 9월 16일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친 임 씨 가족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됐다. 부모님과 동생은 부산에 집을 받았지만, 임 씨는 가족과 떨어져 마산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한국에 왔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마산을 택한 이유는 공업단지가 많아 일자리가 많다고 들어서였다. 정부에서 내준 임대주택에 도착해 가구 몇 개를 사니 수중에 있던 정착금 300만 원이 하루만에 없어졌다.
마산에 도착한 날부터 생활정보지에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리고 이튿날 주유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신분증도 나오기 전이어서 주유소 사장은 경찰서에 전화해 그의 신원을 알아본 뒤 일해도 좋다고 했다.
주유소에서 3개월쯤 일했을 때 탈북민 정착지원기관 남북하나재단 홈페이지에 GM대우 수원서비스센터에서 탈북민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이곳에서 일하려면 운전면허증이 필수라고 해서 곧바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해 면허증을 땄다. 다음날 수원으로 올라갓다. 올라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팔자는 왜 이렇게 바퀴와 인연이 있을까. 북한에서는 광차를 끌다가, 포병부대에서는 방사포차를 다루다가, 제대해서는 철도에서 일했는데 이제 자동차 바퀴를 다루게 됐네….”
서비스센터에서 1년 2개월을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 만족도는 점점 떨어졌다. 가장 큰 불만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을 보니 월급도 그리 많이 오르는 것 같지 않았다. 자동차 부품처럼 매일 똑같은 일하면서 늙어가고 싶진 않았다.
“나만의 평생 직업을 찾아야겠다. 북한군에서 10년 동안 별 일을 다 해봤는데 몸으로 버티는 거야 못할까” 하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그가 정한 아이템은 출장 자동차 광택 사업이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면서 대형 센터가 처리하지 못하는 자동차 외장 관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 분야 장인으로 인정받아 봐야겠어.”
2009년 4월 단돈 600만 원으로 출장 광택 일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출장 광택사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홍보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이 업종의 주요 홍보 수단은 전단지였다. 임 씨도 처음에 전단지를 열심히 돌렸지만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왜 전단지를 뿌리고 있지”라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
그는 걸음마를 떼던 인터넷 검색광고 시장에 눈을 돌렸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열심히 홍보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감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새벽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그야말로 몸을 갈아 넣으며 일했다. 퇴근할 때는 온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주머니에 든 두툼한 현금 뭉치를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하니 돈도 모아지고 기술도 늘었다.
모은 돈으로 2011년 용인지식산업센터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 홍보 방법도 잘 터득해 사무실에 앉아 전국에 오더를 뿌리는 일도 했다.
사업이 잘되니 무서움이 사라졌다. 광택만 내는 것이 아니라 광택 및 세차 용품도 팔아 보자고 생각했다. 미국의 한 자동차용품 회사와 총판 계약을 맺어 온라인 매장을 열고 직원도 뽑았다. 대실패였다. 총판사업에 손을 댄 순간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번 돈을 다 쏟아붓다 마침내 손을 들었다. 첫 시련이었다.
서울 강남에 자동차 정비업소를 차린 2014년 임충익 대표.
● 강남에서 새로 시작하다
직원도 하나둘 떠나고 통장 잔고도 텅텅 비어 갔다. 임 씨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그는 홀몸도 아니었다. 사업이 잘 나가던 2012년 결혼을 한 아내는 임신을 했다. 어떻게 하면 재기할 수 있을까만 고민할 때 한 직원이 “용인은 시장이 한정돼 있으니 서울 강남에서 새로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솔직히 임 씨는 강남을 거의 몰랐다. 그러나 그곳에선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났다. 2013년 그는 대출금 2000만 원으로 강남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가게 문을 여는 날 결심했다.
“3년 안에 이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들 거야.”
그때부터 가게에만 붙어살았다. 집에는 1주일에 한 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렸다. 경쟁력은 저렴한 가격이었다. 강남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박리다매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뼈를 갈아 넣어야 했다. 고객과의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만 눈을 붙이고 작업했다. 직원도 없이 홀로 버티다 관절도 망가졌다.
하지만 그런 시절을 이겨내니 점점 고객이 늘었다. 2년 뒤 가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눈물을 몰래 훔치고 공구를 잡았다.
3년쯤 지났을 때 강남구 대치동에 마음에 드는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 그러나 보증금 1억 원이 없었다. 속을 썩이고 있을 때 거래처 사장이 선뜻 1억 원을 빌려줬다. 그동안 봐온 그의 성실함과 약속은 무조건 지키는 신용을 믿었던 것이다. 대치동에 옮겨온 뒤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번 돈 대부분을 재투자했다. 기술자들을 영입했고 다양한 장비와 설비를 마련했다. 그의 업체는 외장 수리, 도색, 광택 코팅, 휠 복원, 덴트(찌그러짐) 복원 분야에서 솜씨 좋은 가게로 소문이 났다. 대표 서비스는 오래된 자동차를 새 차처럼 복원하는 ‘자동차, 새 차 만들기’ 프로그램이다.
처음부터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위기는 고객 응대였다. 북에서 온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이른바 ‘진상 손님’을 상대하는 법이었다. 이 때문에 혼자서 많이 울기도 했다. 거액을 합의금으로 지불하고 화가 나 문을 닫을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속상한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마인드를 바꿨습니다. 서비스 일은 맞고 틀리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업 초기에 제가 많이 모자랐던 겁니다. 찾아와 줘서 고맙고, ‘저 사람은 저런 것’임을 내가 인정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니 다툴 일이 없어졌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때였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줄어드니 자동차 수리 일감도 줄었다. 주변에서 문을 닫는 동종 업체가 늘어났다.
“코로나19 시기에 매출이 30% 떨어진 업소는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10% 떨어지면 1년 안에 문을 닫더군요. 저도 초기엔 잠시 위축이 됐지만 이게 기회일 수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 업종은 단골이 중요한데 폐업한 업체 단골을 우리 손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전문 모델까지 써서 홍보 영상을 제작했고 온라인 광고도 더 늘렸다. 자본금이 적은 그에게 공격적인 마케팅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과거 온라인 홍보를 해본 그의 경험상 확신이 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점점 고객이 늘었고 매출도 늘었다.
대출 2000만 원으로 시작한 강남 생활 13년 만에 기술자 3명을 두고 연매출 10억 원을 찍는 사장님이 됐다.
2021년 충남 태안 해수욕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는 임 대표. 네 아들은 언제나 그의 에너지원이다.
● “만족은 제 안에 있습니다.”
임 씨 가게 앞에는 최고급 외제차가 즐비하다. 그는 자동차 외형 복원 업계 ‘달인’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그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동차 전문가로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신분을 밝힌 적도 없다.
“탈북민인 게 장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국에서 탈북민이 성공하면 국가 지원을 받아 됐다고 보는 시선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서 프랜차이즈로 확장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돈을 많이 번 사장 보다는 인정받는 장인이 되고 싶은 꿈이 더 크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가 마무리입니다. 작업 후 남는 미세한 결함을 수정하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제가 직접 합니다. 이 단계가 품질 차이를 만듭니다. 규격화가 불가능한 이 업종에서 매장만 확대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자라서인지, 동해안 한 도시에서 바다 일에 종사하는 임 씨 동생도 성공했다. 직원 수십 명에 연매출 수십억 원인 사장님이 됐다. 집도 두 채를 사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동생이 흘린 눈물도 임 씨 못지않았다.
쥐약을 품고 태풍을 헤치며 닷새 동안 동해를 가로질러 새 삶을 찾은 임 씨 형제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땅에 든든히 닻을 내렸다.
“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 길이 생깁니다.”
임 씨는 아들만 넷을 둔 아버지다. 맏이가 12살, 막내가 5살이다. 가족은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자식들이 잘 성장할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고 이후엔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제 그릇이 보이더군요. 그릇만큼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에서 비싼 외제차를 다루다 보니 많이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금껏 상대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만족하면 그게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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